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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혜

명절이 돌아오면 우리 엄마 손맛은 단연코 식혜에서 살아난다. 보리에 싹을 틔워 초록 순이 돋아나면 깨끗이 건조하여 찧은 수제 엿기름에서 시작된다. 생수를 붓고 망사주머니에 담은 엿기름을 물에 담그고 조물조물 주무르면 엿기름물이 우러난다. 엿기름물이 어느 정도 우러나면 잠시 두어 녹말이 가라앉힌 뒤 맑은 윗물을 밥솥에 붓는다. 찹쌀로 지은 고두밥도 밥솥에 넣은 뒤 보온으로 2ㅡ3시간이 지나면 밥알이 동동 뜬다. 삭힌 식혜물을 솥에 옮겨 팔팔 끓인 후 구운 소금 한 꼬집을 넣고 다따무리 해지면 아카시아 꿀로 당도를 맞춘다. 다음은 냉장고로 고고씽~~~!! 식혜를 꺼내기 무섭게 모두가 저요 저요 하는 배봉린표 식혜다. 엄마에게 배운 식혜 만드는 법을 잊어버리기 전에 티스토리로 옮겨 보았다.

풍경

모두 차를 돌려세웠다. 설을 보내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갈무리해 둔 부모의 마음은 여러 보따리가 되어 트렁크에 실린다. 어둔한 몸이 더욱 바빠진다. 자식의 차에 실려 갈 수 없지만 당신의 모든 것을 실어주고 싶어 한다. 부모란 흔들림이 없다. 떠남의 시작과 돌아옴의 마지막이 될 컴퍼스 회전축 같은 존재. 끊임없이 덜어내도 마르지 않고 고장 난 계산기로도 셈이 틀리지 않는다. 그저 손만 흔들어도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는 자식과 손만 내밀어도 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 그들은 텔레파시로 소통하는 우주인이 틀림없다.

설날

이미 일찍 오라는 시어머니 명을 받았기에 눈곱 떼기 무섭게 시댁으로 향했다. 어제의 수고가 상위에 차려졌다. 사골국물로 떡국을 끓이고 마늘조각 잔뜩 올려 스테이크를 굽는다. 가난의 시대 음식이 약이 되던 때에는 새해 첫날이라도 배불리 먹어야 건강한 한 해를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요즘은 너무 잘먹어서 탈이다. 이제 시대에 따라 차례상도 달라져야 한다. 단촐하게 차리고 먹는것을 줄여야 건강한 한해를 보낼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놋제기. 목제기 제례상 병풍등이 집안 필수품목이었는데 요즘은 당근마켓에 무더기로 나온다. 과다섭취로 인한 각종 성인병에 걸리지 않도록 기원하는 설맞이... 이 글을 보는 모든 님들께도 작게 먹고 단식하는 건강한 한 해를 기원해 본다.

건국전쟁

정택주의 리뷰를 보고 부랴 부랴 영화표를 예매했다. 설 연휴가 시작되어 괜스레 바빴지만 연휴 중에 종영된다고 하여 더욱 서둘렀다. 한산한 영화관 스무 명 남짓의 관람객이 자리를 잡고 있다. '건국전쟁' 포스터 한 장 없지만 사실을 근거로 한 귀한 영상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다. 북측 편이 된 김구가 이승만의 훼방꾼이 되어 대한민국을 배신하자 관람객 중 누군가 "개새끼"라고 한다. 여자는 눈으로 울고 남자는 코로 우는가 보다. 여기저기서 눈물냄새가 났다. 세계열강들이 짓밟고 간 동토에서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의 삶을 일깨우기 위해 홀로 싸우는 건국전쟁에 가슴이 미어졌다. 적화야욕을 위해 발톱을 세우는 공산주의에 맞서왔던 국부 이승만. 간첩들의 모략으로 끝내 망명자라는 오명을 쓰고 죽어서야 그의 나라로 ..

사랑인줄 알았는데 부정맥

'심장이 뛰어서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일본 노령화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5-7-5의 총 17개 음으로 표현한 짧은 시집이다. '무농약에 집착하면서 내복약에 절어 산다' '손잡는 것이 젊을 때는 사랑 늙어서는 부축' '술값에서 약값으로 변하는 나이' '허리보다는 입에 달고 싶은 만보기' '이거 저거 그거로 볼일 다 본다' 등등...!! 실버센류 공모전에서 수상한 88편의 이야기가 판매 90만 부 돌파라니 매우 흥미롭다. 한 문장으로 함축되었지만 글씨가 씨앗처럼 마음에 와 콕콕 박힌다. 붓가는데로 쓰자는 우리 수필은 지방과 살을 교묘히 배치하여 숨은 뼈다귀 찾기만 하고 있는데...!! 밥상에 마주 앉는 사람에도 외면당하는 200자 원고지 몇 매 내외...!! 한 번만 봐달라고 눈앞에 펼쳐줘도 시..

카테고리 없음 2024.02.08

습관

출근길이다. 맞은편에서 생수 2리터 6개들이 한 세트를 들고 힘겹게 오고 있는 그녀. 비닐앞치마를 발목까지 내려 입고 어기적 어기적 억지로 걸음을 내딛는다. 무릎이 아파서 30년간 해오던 식당을 정리하였으나 이내 반찬가게를 다시 열었다. "놀면 뭐 하냐고?" 일흔을 훌쩍 넘겼음에도 일이 습관이 되어 억지로라도 꿈적거리는 것이 낫다는 그녀다. 어엿한 자식도 있고 매 달 월세가 나오는 자그마한 건물도 있는데 노는 것보다 일하는 게 좋다고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했는데 속속들이 박힌 아픔과 온전치 못한 다리만 남은 것 같다. 옛말에 '팔자는 길들이기로 간다.'는 말이 있다. 푼돈 벌어봐야 병원비, 약값도 안된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밑질 일을 붙잡고 매달리는건 더 큰 병이 아닐까?

모발

얼마 전 지인이 사무실에 들렀다. 퇴직을 하고 나면 남자들은 염색을 멈추고 자연주의로 돌아가는 것일까? 파마를 하였지만 엉성한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가르마를 타고 누웠다. 어쩌면.. 자연주의가 아니라 자연인이 된 것 같다. 눈치라도 챈 것일까.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곧 모발이식을 한다는 것이다. 빽빽한 뒤쪽 머리숱으로 헐빈한 앞쪽을 메우겠다며 이미 절반은 실행에 옮겨놓은 것 같았다. "왜요? 머리가 시려요?" 아무리 춥고 더워도 모자만 있으면 충분한데 굳이 모발이식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가 들면 순리에 순응하며 멋있게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갸우뚱하였다. 바깥 머리 심는 아버지도 좋지만 안쪽 머리 채우는 아버지는 더 멋있는데...!! 아침에 일어나 거울에 비치는 엉성한 머리숱을 ..

명절임박

모처럼 골프연습장 동기들과 점심을 먹었다. 4명 중 큰며느리는 나뿐이다. 모두 둘째이거나 셋째이다. 명절 음식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당연히 나뿐이다. 옛날 방식에서 깨어나지 못한 시어머니는 설 차례상이나 추석 차례상에서도 돌아가신 시어른를 소환한다. "우쨋든동 당신 아들 딸들 잘 돼거르 해주세이" 살아서도 못한 것을 죽고 없는 영감에게 매달리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명절음식 준비에 허리가 부서지도록 지지고 부치고 볶고 끓여야 하는 며느리몫의 고통분담은 어디에도 없다. 남편은 어무이 계실 때까지만 차례를 지내자고 한다. 100세 시대에 77살 어머니가 안 계실 때쯤이면 내 내이도 여든이다. 하루가 다르게 시대는 변하는데...!! 우리 시어머니는 시대와 불통이고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은 늘 그랬듯이 남의..

미스터트롯

미스터트롯 2의 공연이 대구 엑스코에서 있었다. 코로나 때부터 남의 손자에 푹 빠진 혼자 계신 할머니를 위해 딸이 예약해 둔 것이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1층 입구에는 반짝이는 별봉을 나눠주며 팬클럽 가입 홍보가 치열하다. 5층 3500석의 공연장은 꽉 찼다. 현란한 조명아래 음악과 리듬이 더해지자 야광머리띠와 수천 개의 반짝이는 별봉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관객들 중 95퍼센트는 여성이고 그중 7할은 50대 후반이다. 한때 노는 언니들인지 어깨춤이 예사롭지 않다. 출연진각자의 매력으로 관객은 응원전으로 2시간 30분의 공연이 아쉽게 끝이 났다. 집으로 오는 길. 어머니 말씀. "재너머 철진네 엄마는 지난번에 콘서트 보고 왔다고 집 비르빡에 ㅇㅇㅇ가수 사진을 크단하기 걸어놨데..." "자기도 다 큰 손..

수컷

구피삼매경에 빠졌다. 이사 선물로 엄마가 주신 항아리뚜껑 속에 2년째 살고 있는 구피들...! 볼품없는 암컷에 비해 수컷은 붉은 드레스를 입은 듯 긴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우아하게 유영한다. 수컷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크고 두 마리는 작다. 생긴 모양새가 흡사한걸 보니 큰 것의 새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놈이 작은 수컷 두 마리만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아마도 암컷을 독차지하려는 수컷의 본능이 자신의 새끼조차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 고작 2-3센티 불과한 어항 속 물고기도 수컷의 본능에 이리도 충실한데...! 일가족이 무리 지어 생활하는 몽골 유목민은 근친상간으로 발생하는 유전자의 폐해를 막기 위해 아내를 손님에게 내주는 풍습이 있다. 침실과 아내를 송두리째 내주고 다른 수컷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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