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 재미 더하기

치자꽃설화

최포근 2024. 6. 11.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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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전라남도 보성 녹차밭
근처를 지나며
잠시 들렀던 사찰 누각 앞에
오래된 치자나무를 보았다.

그동안 여러 사찰을
다녀보았지만
치자꽃을 본 건 처음이었다.

문득
지독한 몸살을 앓고 떠나간
설화 속 여인이 생각났다.
인연인가 싶어
목석처럼 버티다가
끝내 촛농 같은
눈물을 가슴속에 떨구며
돌아서기까지
마른침을 가시 삼키듯 하였을 그 여인.
치자꽃처럼
희고 빳빳한 순결도
덩그러니 매달린 법당 추녀 끝
풍경소리만큼이나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치자꽃 설화 /박규리  》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 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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